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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대로 리뷰

폭력으로 점철된 현실, 희망의 씨앗을 심은 영화 - <신성한 나무의 씨앗> 해석

by loneboy 2025. 6. 8.

 

 
신성한 나무의 씨앗
꿈에 그리던 수사판사 승진을 하게 된 ‘이만’, 때마침 테헤란에서는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가 일어나고 ‘이만’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총을 지급받는다. 그러나 딸들과 논쟁을 벌인 어느 날, 총이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가족의 믿음에는 균열이 생긴다. 지금 반드시 목격해야 할, 올해 가장 용감한 걸작.
평점
-
감독
모함마드 라술로프
출연
미사그 자레, 소헤일라 고레스타니, 마사 로스타미, 세타레 말레키

 

존재 자체가 기적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외침이 생명의 위협으로 돌아오는 사회에서, 감정적 절규를 완성도 높은 영화로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온갖 헐리우드 영화보다도 훨씬 더 영화같은 일이다. 

 

이란에서의 영화 탄압은 악명 높다. 영화감독 자파르 파나히는 이 현실을 오랫동안 전 세계에 고발해 왔다. 2010년 이란 정부를 비판한 이유로 그는 6년의 징역형과 20년간 영화 및 여행 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아이폰으로 자신의 집에서 다큐멘터리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This is Not a Film)>를 만들었다. 이 작품을 칸 영화제에 출품하기 위해 케이크 안에 USB를 숨겨 보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그의 열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작 <노 베어스>에서도 그는 터키 국경 인근 마을에서 영화 촬영 현장을 원격으로 지휘하며,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본인과 사랑할 자유 마저 박탈당한 이란인의 이야기를 전 세계에 알렸다.

 

2024년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 <노 베어스> 유튜브에서 감상 가능 https://www.youtube.com/watch?v=4mhREtMFzu0

 

 

<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감독 모하마드 라술로프도 그와 유사한 길을 걷고 있다. 모하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이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이란 정부에는 가짜 시놉시스를 제출하고 유럽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촬영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영화가 세상에 공개된 현재, 그는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과 함께 독일로 망명했다. 하지만 배우 중 한 명은 여전히 이란에 남아 가택연금 상태로 태형을 기다리고 있다. 

 

21세기의 독재 탄압, 거꾸로 가는 이란 

 

 

20세기 초중반까지도, 이란은 팔라비 왕조의 통치 아래 사회 전반을 서구화했다. 당시 이란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며 서구식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서울시와 자매결연을 맺어, 서울시에 테헤란로가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1970년대 이란에서는 여성들이 히잡 착용에 대한 강제가 없었고, 참정권도 보장받는 등 중동에서 가장 진보적인 여성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팔라비 왕조의 정책은 이란 사회에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를 가져왔다. 막대한 석유자원 덕분에 중동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지만, 그 혜택은 서구화된 도시 사람들에게만 집중되었다. 그 결과 빈곤한 지방의 농민과 종교 지도자, 보수층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 불만은 급진 이슬람 세력을 이끈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1979)’으로 이어져 팔라비 왕조가 무너졌다.

 

혁명 직후 이란 여성들은 새로운 정권에서도 성평등이 보장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호메이니 정권은 여성들을 주요 권력 구조에서 배제했고, 1980년대 초반에는 모든 여성의 히잡 착용을 강제로 법제화했다. 

 

이슬람 문화가 사회 전반에 정착하고 약 40년이 흐른 후, 2022년 이란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 벌어졌다.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마흐사 아미니가 이란의 ‘도덕 경찰’에 의해 체포된 후 사망한 것이다. 이란 정부는 “뇌졸중으로 인한 자연사”라고 주장했지만, 현장에 있던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미니는 체포 직후 심각하게 구타당했다. 또한 부검 결과 두개골 골절과 뇌출혈, 몸 전체의 멍 자국이 확인되었다. 자연사가 아닌 공권력에 의한 타살이 명백했다.

 

21세기에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성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에, 이란의 여성들뿐 아니라 청년 남성들도 분노하며 거리로 나왔다. 이들의 외침은 ‘여성, 생명, 자유’라는 강력한 구호로 이란 전역에 퍼졌다. 하지만 이란 정부는 여전히 무자비한 폭력으로 답하고 있다. 2022년 10월 말 기준 최소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이란 국영매체의 보고가 있으며, 국제 인권 단체들은 실제 사망자가 500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이 사망자들은 대부분 정부 특수부대가 산탄총 등 치명적 무기를 사용한 결과였다.

 

한 영화 속 두 가지의 시선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여성 생명 자유’ 집회가 시작되는 시점의 한 가족 이야기를 다룬다. 아빠와 엄마, 20살 큰 딸과 고등학생 작은 딸로 이루어진 이 가족의 평화는, 아빠의 판사 수사관 승진과 집회의 고조로 격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영화는 이 가족의 이야기를 두 가지 리얼리즘으로 조명하고 있다. 전반부는 과거 이란 영화 <시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연상시킬 정도로 지독하게 현실적인 드라마로 전개된다.

 

판사 수사관으로 승진한 아버지는 신변 보호를 위해 정부로부터 권총을 받지만, 승진과 동시에 ‘신의 말씀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체포된 이들을 처벌하는 문서에 강제로 서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처음에는 저항했으나 결국 가족의 생계를 위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서명하기 시작한다. 한편 대학생인 큰 딸은 친구가 집회 도중 경찰의 산탄총에 맞아 한쪽 눈을 잃자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부모는 아버지의 지위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해 이를 외면한다.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권총이 사라지자 부모는 큰 딸을 의심하고, 진실을 밝히려 할수록 가족 간 신뢰는 무너지고 적대감만 깊어진다.

 

이 시점까지 영화는 밀도 높은 인물 묘사로 세대 간 갈등을 다방면으로 조명한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현 사회 체제를 유지해야만 하는 부모 세대와, 억압을 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젊은 딸들의 세대 갈등이다. 영화는 어느 한쪽이 무조건 옳다고 단정하지 않고 양쪽의 입장을 균형 있게 보여주며, 이 문제가 개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체계적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영화 속 집회가 실제로 벌어진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 SNS 영상들을 보여준다. 시위대를 자동차로 치는 장면,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특수부대가 건물로 들어가자 여성들이 비명을 지르는 장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청년들의 모습이 여과 없이 나타나 현재 이란에서 벌어지는 일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러나 이후 영화는 갑자기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판사 수사관인 아버지의 신상이 대중에게 노출되고, 집에서 더 이상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자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으로 은신하기로 한다. 은신처로 가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정체를 알아챈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면서 영화는 갑작스러운 자동차 추격전을 선보인다. 이후 아버지의 권총을 숨긴 인물이 드러난다.

 

이 시점부터 영화는 현실적인 드라마 장르에서 완전히 탈피해 헐리우드의 스릴러 영화 같은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현실적인 이유로 가족을 억압하던 아버지는 이성을 잃고 여성을 억압하는 단편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현실에서는 말없이 관조하던 작은 딸이 모든 사건의 주인공으로 부상한다. 특히 고등학생 정도의 작은 딸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사용되던 카세트 테이프와 방송 장비를 능숙하게 다루는,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장면까지 등장한다.

 

대부분의 영화가 이토록 급격한 톤의 변화를 시도하는 일은 드물기에, 처음에는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끝까지 보고 나자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의 전반부가 관찰자의 시점이었다면, 후반부는 적극적인 화자의 시점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 영화의 목적은 단지 이란의 실태를 고발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목적만 달성하려 했다면 다큐멘터리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다큐멘터리로 현실을 조명하는 동시에, 온갖 상징으로 가득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자신의 메시지를 더욱 강력히 전달하고자 했다.

 

그 메시지는 아마도, 이 세태를 바라보는 어린 청년들이 기존의 가부장제 사회를 파괴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이란 예언일 것이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보리수 나무는 독특한 생애 주기를 가진다. 새의 배설물 속에 담긴 씨앗이 다른 나무 위에 떨어지면, 그 나무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이후 보리수 나무의 가지는 숙주가 된 나무를 둘러싸 조여 죽이고, 보리수 나무는 홀로 서게 된다.”

 

영화는 이 문구 그대로 결말을 맞이한다. 작은 딸은 언니의 영향을 받아 사회 변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결국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아버지를 직접 물리치며, 이란 사회가 폭력의 시대를 넘어 다시 ‘여성, 생명, 자유’를 누리는 시대로 나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이 모든 게 헛된 망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감독은 다시 SNS 영상들을 넣는다. 영화 중간에 보여준 영상과 달리, 이번 영상들은 폭력에 시달리던 집회의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다. 그리고 히잡을 벗은 여성이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자신이 보여준 환상이 결코 망상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미래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상당히 실험적인 전개다. 몇몇 관객에게는 개연성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으로 점철된 현재 이란의 실태를 고발하면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동시에 담아내기는, 그 어떤 글이나 다큐멘터리로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전개야말로 오직 영화이기에 가능한 방식일지 모른다.

 

극과 극으로 나뉜 세상 

 

<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판타지 성격이 짙은 후반부로 인해, 영화는 더 이상 단지 이란에 국한된 이야기로만 남지 않는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묘사된 혼란스러운 이란의 현실은 사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갈등 중 한 단면일 뿐이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정부 이후, 불법 이민자를 단속한다는 명목으로 LA에 주 방위대가 투입되며 집회가 폭력적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극우 유튜브의 정보에 빠진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면서, 국정이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각종 SNS를 통해 무분별한 정보와 가짜 뉴스가 진실과 뒤섞이면서, 현대 세계는 영화에서 묘사된 이란의 상황만큼 폭력적이지 않을지라도, 정보와 사실 관계는 더욱 혼란스러울 수 있다.

 

이처럼 극단으로 치달은 시대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워졌다. 시민들은 극우와 극좌의 갈등에 빠져 서로를 향한 증오와 혐오를 키우고, 결국 폭력까지 자행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 기적 같은 희망이, 우리나라에서 아주 먼 이란의 억압된 현실 속에서 피어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폭력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결코 헛된 희망이라 치부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매트릭스>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오래전에 경고했던 AI의 위협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으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나 <13인의 성난 사람들>이 제시했던 바대로 편견과 인종차별을 줄여가고 있다. 이처럼 영화가 제시한 미래의 모습과 가치들이 현실이 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중요한 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믿고, 우리가 직접 변화를 만들어 가는 일일 것이다.